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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에 잠시 한국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사온 책 중 한 권이다. 과학철학 입문서를 표방하는 책인데, 내용 자체도 지나치게 어렵지 않고 깔끔한 편이다. 저자의 블랙 유머가 중간중간 가미되는 편인데, 너무 대충 읽으면 본뜻을 정 반대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으니(...) 읽으면서 그 점에만 유의하면 될 것이다. 다음 내용은 책 본문 중 '지적 설계론'에 관한 언급을 한 내용이 있어 공유하고자 옮겨 보았다. 요약하자면, 역시나 지적설계론은 증거 없이 추론만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게으른 논증에 불과하다는 얘기.




진화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세한 수학적 원리가 바탕이 된 방대한 체계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양한 진화 원인의 영향 아래서 개체군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유전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과 종 내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 및 환경과 상호교류하는 방식에 대한 풍부한 실험적 자료가 이 체계를 보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종 분화", 즉 신생 종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과 함께 종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다. 이런 책에서는 자연선택이 야생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진화 과정이 지닌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논쟁들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꼼꼼한 실험에 근거한 것이다.


윌리엄 뎀스키와 마이클 비히가 지지하는 지적설계이론은 과학 이론을 자처하는데, 이 이론은 최소한 몇 가지 경우에 생물체가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지적 설계 관점에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마이클 비히는 편모(요동 모터처럼 생물체에 붙어 빙글빙글 도는 채찍 모양의 가는 실로, 어떤 종류의 박테리아는 이 편모로 인해 액체 배지에서 잘 돌아다닌다)가 자연선택 때문에 출현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이 지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이 비히의 주장이다. 지적설계론자들은 편모 같은 데서 드러나는 유기체의 적응이 특히 기독교의 신과 같은 특정 신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말을 피해 왔다. 이들은 보통 이 지적인 존재의 본성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는 대신 우주를 돌보는 어떤 지적인 존재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적설계이론은 어떻게 자연선택론을 반박하는가? "다윈의 블랙박스"라는 자신의 책에서 비히는 박테리아 편모가 많은 다른 특징과 더불어 그가 말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편모의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면 편모의 운동 자체에 부분 장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의 생존과 번식에 무용한 신체 기관이 된다. 편모의 전반적인 운동이 너무나 정교하게 짜여 있으므로 일부분이라도 장애가 생기면 제대로 된 생물학적 기능을 하는데 엄청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비히에 의하면, 자연선택론자들은 처음에 단순했던 특징들이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 복잡한 특징으로 바뀐다고 여긴다. 그런데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었을 때 전반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생물 기관이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을 실제로 발견하게 된다면, 그런 기관이 점진적인 발전 때문에 생긴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비히의 주장이다. 즉, 비히는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의 존재가 자연선택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리게 된다.


비히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편모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일부만 남은 편모가 회전 운동은 하지 않지만, 단백질 독소를 다른 세포에 전달해준다는 면에서 여전히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와 편모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자연 선택론과 양립할 수 없다는 비히의 입장은 틀렸다. 그는 오랜 시간 점진적인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등장한 생물체의 기관이 처음에는 엉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기관의 경우 일부가 제거되거나 변형되는 일이 자주 있어도 전반적인 기능에는 거의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자연선택을 통해 전반적인 효율성을 위해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부분들이 점진적으로 제거되어 나가다가 더 제거되거나 변형될 경우 기능 자체가 안되는 시점에 이르면 마침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기관이 나타나는데, 이때 점진적인 과정을 통한 이 기관의 출현을 자연선택 이론은 충분히 설명해낼 수 있다. 물론, 비히 입장에서는 편모가 실제로 이렇게 출현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비판을 할 수 있다. 단순한 시작에서 점진적으로 세련되어진다는 가정이 전적으로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의 지적설계이론이 편모의 존재를 자연선택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런 무리한 반대 주장은 사실 허구 상황을 통해 대략 설명하는 것으로 아주 쉽게 반박이 된다.


좀 양보해서 자연선택으로 설명되지 않는 생물학적 기관이 있다는 비히의 주장이 바르다고 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비히는 그것을 규명해내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지적설계이론이 편모의 존재를 설명해 준다는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적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편모의 특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명확하게 하기는 힘들다.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화성에 지능적인 설계자들이 산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이 설계자들이 얼마나 지능이 뛰어난지, 몸집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게으른 존재인지, 얼마나 협조적인 존재인지, 어떤 경제적 급선무를 지녔는지, 또 어떤 자원을 이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주기 전까지는 이 존재가 어떤 것을 설계할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지적설계이론이 박테리아의 편모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지적 설계자가 지녀야 할 기구와 능력, 설계의 개요, 계획을 시행하고 개선하는 방식, 그리고 쓸 수 있는 자재물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유기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지 진화론자들이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지적설계론자들은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생물학자들은 진화 과정에 대해 추정만 하고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유전 변형률과 자연선택론의 강점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운 뒤 추정한 내용을 직접 실험해본다. 이와 달리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설계자가 어떤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정을 실험대에 올리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 유기체 세계의 변화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반면, 지적설계이론은 그 빈약한 증거 자료로 인해 헛웃음을 자아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지적설계이론은 진화 생물학에 상반되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지적설계론자와 진화생물학자는 편모와 같은 기관이 형성된 과정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하지만 지적설계이론이 "위협적인" 경쟁이론이 되려면, 다시 말해 강력한 증거 자료를 갖춘 이론이 되려면, 진화 생물학처럼 종분화와 생물체의 적응에 대해 철저한 실험에서 나온 자료가 바탕이 된 강력한 이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적설계론자들이 과학자라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설계 과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교과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 설계 과정이 외부 요인에 의해 위협받고도 또 언제 외부 요인을 극복하는가?"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지능적인 설계자의 본성은 무엇이며 그 설계자는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는가?" "상충하는 설계명세서를 접했을 때 설계자는 보통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설계론자들이 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우리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설계론자들은 우리 손에 생물체 세계의 목록, 그것도 엄청나게 긴 목록을 쥐어주면서, 생물체 체계가 자연선택론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말만 할 뿐이다. 이런 태도를 지닌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 팀 르윈스,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2장: 그런 것도 과학인가 中 '증거와 지적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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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주제는 시대를 초월해서 핫한 주제인듯 하다.

이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다양한데, "낙태"를 예로 들면, 극단적으로 가자면 "수정 직후부터 영혼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낙태는 살인이다" 에서부터 "태아는 독립적 생존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모체에 기생하는 모체 기관 조직의 일부 또는 모체를 이용하여 자기증식하는 기생체일 뿐(‪‎fetal parasitism‬)이므로 낙태할 권리는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 까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로마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며, 후자의 경우는 여성인권운동의 발로에서 소위 '모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주장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이것은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들어 배포중인 이미지 카드 중 한 장이다. 소위 페미니즘 진영에서 자주 제기하는 주장 중 하나인데, 어떤 맥락에서 나온 주장인지 그 취지는 이해하나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주된 맥락은 모든 여성들에게 모성을 강요하고 여성에게만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취지에서 시작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를 자의로 중단했을 경우에 찾아오게 되는 죄책감 및 사회의 비난에 대항하는 논거로써 사용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많이 내세우는 것이 1950년대에 의료계에서 주장하던 fetal parasitism, 즉 태아는 모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기생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모체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논리다. 그로써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게 됐을 경우 낙태시술로써 임신과정을 중단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약간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생명윤리학자 임종식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가 (당시 서울대 철학과 강사/가톨릭대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상임연구원) 철학자 Michael Tooley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을 브릭(BRIC)에서 발행한 웹진에서 찾을 수 있었다.(pdf 링크)

콜로라도 주립대학 철학과의 Michael Tooley 교수는 "the moral symmetry principle(도덕적 동등성 원리)"로써 "the potentiality principle(잠재성 원리)"에 반박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Tooley의 주장은 "태아는 생존권을 지닌 존재"라는 명제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과과정 또는 관계를 새로이 만들지 않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행위로 볼 수 없을 경우, 그러한 과정이나 관계를 차단시키는 것 또한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도덕적 동등성 논리"로 요약된다. 즉 (인과를 만들지 않는 행위인) 피임이 심각한 잘못이 아니라면 (인과를 차단하는 행위인) 낙태 역시 그렇게 심각한 잘못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그 근거로써 한 쪽이 살려면 다른 한 쪽이 죽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을 예로 들어 인간의 생명을 동등하다고 볼 경우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동등성"은, 그 행위의 "동기"를 인지함으로써 반박될 수 있다. 즉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살리지 않는 것"과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써 죽이는 것" 사이에는 도덕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필자의 말을 빌면. "어떤 행위가 자연적인 흐름을 차단했는지 그리고 자연적인 흐름을 차단한 것이 상대방의 죽음에 원인으로서 기여했는지가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자연적인 흐름을 시작하지 않는 피임과 그 자연적인 흐름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낙태 사이에는 도덕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태아’는 당연히 ‘인간’에 해당한다고 본다. 배추벌레나 배추흰나비나 배추흰나비 알이나 모두 배추흰나비라는 동일한 하나의 ‘종’으로 보는데 왜 유독 ‘인간’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 또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건 ‘죄책감’의 문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살인은 나쁘다’고 배운다. 물론 ‘대의’를 위한 ‘숭고한’ 살인 또한 존재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살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배우는 것이 사실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할 경우 낙태를 한 사람은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들의 ‘도덕적’ 비난 또한 감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우려면 그 ‘(모든) 살인은 나쁘다’는 개념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태아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 크게 두 가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나 싶다. 페미니즘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후자를 택하는 경향이 있는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취지’는 이해하나 ‘동의’는 못하겠다고 할수밖에 없다.


"태아는 사람인가" 여부에 대한 입장은 첨예하고 복잡한 윤리적-철학적 이슈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사실 이 주제에서는 어느 한 쪽을 무조건 옳다-그르다 규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실제로 그 어떤 주장도 반대되는 주장에 확고하게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쉽게 가는 법이 있긴 하다. 극단적으로 가면 된다. 수정 또는 착상 직후의 태아를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고 그에 대한 기본권을 모두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태아는 그 자체로써 '인간'이라 할 수 없으며 단지 모체라는 '숙주'에 연결되어 영양분을 먹고 증식-분화하는 '기생체' 또는 '암세포와 비슷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삶이 언제나 그렇게 극단적으로만 흐르던가? 그렇게 되면 결국 "관점의 차이"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기 마련이다. 무릇 "윤리"나 "철학"의 문제는 "과학" 또는 "사실"의 문제와 많이 다르다. 일단 그것부터 인정하고 나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듯 하다.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임종식교수가 BRIC 에 올린 글은 총 세 개로, 이 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Citation: 임종식(2003). 태아는 어떤 존재인가?-잠재력논변을 중심으로. BioWave, 5(2): 2. Available from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review0&id=493 (Mar 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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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앨런 소칼의 소위 '지적 사기 사건'에 대해 작가 클리포드 골드스타인이 설명해주는 동영상이다.

90년대 초중반, 과학지식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회구성주의가 철학계에서 유행하여 인지의 불완전함에 따르는 지식의 상대성을 앞세워 과학 지식 또한 사회적 구성에 따른 상대적 지식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현실의 객관적 실체를 인정하는 실재론자들 및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따르는 과학자들과의 논쟁이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당시 포스트모던 사회구성주의 철학 저널인 [Social Text]에서 과감하게 피어 리뷰를 생략하고 이 주제를 다룬 "과학 전쟁" 특별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앨런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편들어주는 척 아무말 대잔치를 해놓은 가짜논문을 제출해서 게재된 뒤, [Lingua Franca]라는 다른 저널에서 이를 폭로한다.


이 일로 [Social Text]지는 1996년에 이그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참고로 이그노벨상은 노벨상 패러디 목적으로 "흉내낼 수 없거나 흉내내서는 안되는" 업적에 수여하는 상이다. 작년 상금은 10조 짐바브웨 달러이며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약 4달러 정도 된다.

"LITERATURE: The editors of the journal Social Text, for eagerly publishing research that they could not understand, that the author said was meaningless, and which claimed that reality does not exist. (문학상: Social Text 저널의 편집인은,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저자 본인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한, (편집인) 본인이 이해도 못한 연구를 기꺼이 출판하였기에 이 상을 수여함)"

사실, 소칼은 그 '논문' 내용 내내 '이건 가짜로 만든 아무말 대잔치다'라는 떡밥을 계속해서 던졌다고 한다.

영상에 나온 내용도,

“알튀세르가 바르게 말했듯이, ‘라캉은 결국 프로이드의 사상에 대해 그것이 필요로 하는 과학적 개념을 주었다.’ 더 최근에는, 라캉의 <위상기하학>은 영화평론 및 에이즈(AIDS)에 대한 정신분석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 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라캉이 말하길 구체의 최초 호몰로지 그룹은 사소한 것이며, 반면 다른 표면의 호몰로지는 심오하다. 또한 이 호몰로지는 1-2회 이상의 절단 이후 표면의 연결성 또는 단절성과 결부되어 있다."

...라고 하면서 이상한 말을 중간중간 많이 섞어넣었다. (뒤의 'initial homology'는 라캉이 정말로 말했던 헛소리를 그대로 인용한거지만.) 

그밖에도,

"It is not clear to me that complex number theory, which is a new and still quite speculative branch of mathematical physics...."

즉, 복소수 이론을 "수리물리학에서 새롭고 사변적인 분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이런 '가짜 논문'으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을 글자 그대로 '엿먹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학 하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정말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할 때가 많은 것이, 원래의 개념을 비틀어 사용했다는 명시도 없이 원저자를 인용해서 개념 설명을 하면서 원뜻을 전혀 엉뚱하게 왜곡해버리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주장들이 가령 "뉴튼의 프린키피아는 강간 매뉴얼이다(Sandra Harding)"라든가, 또는 물리법칙에서의 기준계와 기호학에서의 행위자를 혼동하고서 "상대성 이론은 사회학적 함의를 갖는 이론이다(Bruno Latour)"라면서 개념을 섞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학에서 특정 개념을 따와서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적용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에 원래의 의미와 다른 방식으로 (비유적으로 또는 analogy로) 사용되었다고 명시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알고서 사용해야 독자나 청자가 오개념을 갖거나 본의를 오해하는 일 없이 분명한 의미 전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식으로 특정 기본 개념에 가치판단적인 개념을 섞어버리고서 원래의 개념을 왜곡해 버리는 것은 결국 말장난에 불과한 것 아닐까. 예를 들어,

"E=mc^2는 필요한 다른 속도에 비해 빛의 속도에 특권적 지위를 주어 우선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성차별적 공식이다." 
- Luce Irigaray

...와 같은 '아무말 대잔치'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노벨문학상 받은 앙리 베르그송 같은 사람도 아인슈타인이랑 "시간"의 개념에 대해 논쟁하다가 틀린 개념 갖고 망신이나 당하는 것 아니겠는가. 철학적 개념을 물리학적 법칙에 빗대서 설명하려는데, 원래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틀리게 적용하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무릇 과학에서는 특정 개념이 정해지면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서 그 개념을 기초로 논리와 사고를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용어의 개념 자체를 왜곡해서 비틀어 버리면 그건 제로존 이론이나 지적설계론처럼 틀린 개념을 전제로 썰을 풀어나가는 아무말 대잔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특정 과학철학자들은 그것조차 하나의 '정당한 과학적 가설'로 취급하긴 하지만,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관련 읽을거리:



관련글: 2017/08/30 - [과학] - [네이버 열린연단] 과학과 문화: 문화에 있어서의 과학의 위상 (오세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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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관련 글들을 찾아보러 가톨릭 경향잡지에서 검색질하다가 발견한 특정 가톨릭 신자 정치인의 글을 옮겨적어 보았다. 천주교 교회사, 민중신학, 해방신학, 과정신학 등에 대한 예상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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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1986년 9월호 - 이 시대의 순교


[모든 것 바쳐 주님의 여사에 동참해야]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와 비견해서 참 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하고 싶다.


종교 철학가들은 말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고등 종교는 그 출발 당시 저변의 민중 속에 뿌리박고 민중에 의해서 힘을 얻은 종교만이 오늘의 대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인류 역사상 수천 수만 개의 종교가 발생했다. 그중에서 오직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만이 전인류적 보편성을 띤 고등 종교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민중 속에 뿌리박았다는 것은 종교가 그 시발에 있어 민중의 편에 서고 민중의 아픔과 한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들의 영적 사회적 구원에 헌신함으로써 민중의 감동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고등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악과 민중 구원의 차원에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은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했다. 순교자가 뿌린 피는 그 종교를 더욱 영적으로 승화시키고 현세적으로 강건하게 만들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순교에 감동되어 순교자의 뒤를 따랐으며 신앙의 진리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마침내 지배자들은 순교자의 피와 그를 따르는 민중의 힘에 압도되어 그 종교의 포교를 합법화하고 지배층 자신까지도 그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 중에도 그리스도교의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고 철저한 것이었음은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창시자인 예수님 자신이 이미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창시자의 순교란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는 예가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 일생을 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당시의 지배계층인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들의 위선과 착취로부터 영적으로 현세적으로 해방시키고자 싸우셨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유다 의회인 산헤드린을 둘러싼 이들 지배층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이름 아래 안식일 정결례 그리고 성전에의 예물 봉헌 규정을 악용하여 민중을 괴롭히고 차별하고 착취했다. 이러한 하느님 모독의 죄악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억압받는 민중과 일체시키고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자로서 단호히 투쟁하셨다. 그러다 마침내 내란을 선동한 정치범으로 몰려서 순교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은 로마에서의 초기 교회의 역사에 역력히 재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와서 3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박해와 피의 순교를 되풀이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노예, 소상인, 병사 등 당시 로마 사회의 저변 민중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황제에 대한 우상 숭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까따꼼바의 지하 묘지를 전전하면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애썼다. 불행히 잡혀가더라도 지배자들이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혹은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혹은 콜로세움의 투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순교에의 정열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예가 없는 이러한 순교 정신에 공포와 경외심을 느낀 로마의 지배자들은 기원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를 합법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철저한 노예 제도,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병사와 소상인에 대한 계급적 차별이 성행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하느님 안에 그들은 모두 한 형제요 평등함을 그리스도교는 선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로마 본국인이나 식민지인이나 모두가 하느님 앞에 같은 자유인임을 그리스도교는 주장한 것이다. 3세기에 걸친 탄압을 대하같이 흐르는 순교의 피로써 극복하고 마침내 대 로마 제국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당시 로마 인구의 10퍼센트 내외밖에 안되었었다. 종교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수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참된 순교의 정신과 그 실행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제 2백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이 땅은 수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순교의 제단에 바쳤다. 제단은 순교자의 피로 씻기고 또 씻기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밖에서 찾아온 신부의 포교에 의하지 않고 이쪽에서 찾아가서 그리스도교를 영입해 온 특별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순교 성인을 낸 영광의 나라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인구는 전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종교나 교파도 한국 가톨릭이 바친 바와 같은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을 치른 일이 없다. 그 순교의 힘으로 이 나라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마침내 실현되었다. 조선 왕조 말엽까지 불교도 동학도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우리 국민의 기본 인권인 신앙의 자유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선구자적 공헌을 다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103위의 많은 성인을 낸 성인 국가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교회의 역사는, 한국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는 교회의 영향력이 그 교인수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힘과 존경을 향유하고 있다. 눌린 자가 있는 곳에,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외침이 있다. 그 외침 속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순교 정신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순교는 반드시 육신의 죽음에 의한 희생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고 그를 증거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순교의 원형은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다가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다. 순교는 자기가 갖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이웃에게, 그것도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내놓는 것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노력만이 아니라, 필요하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은 공산 국가에서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이 팽배하고 있으며, 세계 도처에서 정치적 지배자에 의한 또는 경제적 사회적 제도에 의한 민중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와 소외가 성행하고 있다. 이때에 억압과 착취와 전쟁을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의 증거자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야말로 참된 순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순교란 원래 그리스 말에 있어서 증거자를 의미했다고 한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는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의 대열에의 참여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큰 의문이 있다. 그것은 왜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순교적 희생이 필요한 사회를 만드신 것일까? 하느님이 참으로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왜 이 세상에 그토록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이 필요로 한 악이 횡행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고 선이 패배하는 수없는 사례들을 우리가 눈앞에서 목격할 때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 번 감옥을 출입하고 일생에 다섯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 직면하는 가운데 이러한 의문과 대결하는 번민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풀고자 무던히 노력도 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 우리를 연단(鍊鍛)하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뜻에서 악을 허락하셨다는 '욥기'적인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단련하고 시험하시려면 선(善)만을 세워놓고 가장 높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경쟁을 시키면 됐지 굳이 악의 창조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어머니의 태속으로부터 천치 바보로 태어난 사람이라든가 원자탄이 떨어져서 일순간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슨 하느님의 연단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엄청난 신앙상의 시련이요 난문이었다.


결국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진화론적 하느님의 역사 설명에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 세상을 처음부터 완전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완성을 인간의 협력을 어어서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협력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의 한복판에 서서 우리를 위로,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며 앞으로 예수 재림의 종말의 날 즉 '오메가 포인트'의 그날에의 도래를 촉진시키는 역사에로의 동참을 위해서 초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러한 역사의 협력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기위해서 이 세상의 악과 모순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싸우다 보면 그 사람은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순교적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은 전진하게 된다. 순교적 희생을 바친 자들은 예수님의 품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 순교적 생활은 이 세상 발전의 밑거름이며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의 길이다. 그리고 자기를 가장 값있고 충족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장래는 신자 수의 다과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따르는 순교적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자와 '교회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악과 절망의 와중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목메어 외치시는 이 시대의 순교에의 초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긴 옥중 생활에서 나의 기도와 묵상은 순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음미하고 재정리하게 만들었다.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마치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증거자로서의 순교적 생활을 미력이나마 나의 정성을 다해서 그분께 바치고자 결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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