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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상식: 한국창조과학회 결성 초기에는 종종 기독교 단체가 아니라 "통일교 단체"로 오인받았다고 한다.

5. 학회 소식지 '창조' 발간
"(생략) 전국의 기독 관련 단체들과 교회들에 '창조'지를 보냄으로써 한국 교계에 창조론 운동의 참뜻이 널리 알려져, 통일교 단체로 오인되었던 것이 불식되고 교계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후략)"

- 출처: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 (http://goo.gl/oKdP06)

그도 그럴것이,
  • 안티지질학은 안식일교에서 정리했고, (≪새로운 지질학≫, 조지 맥크레디 프라이스‬, 1923)
  • 안티진화론은 통일교에서 정리했다. ‪(≪진화론의 우상들≫조나단 웰스, 2000‬)

특히 조나단 웰스라는 인물은 지적설계론 쪽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통일교 신자이면서 분자생물 및 세포생물학 PhD 학위자라고 한다. 특히 키츠밀러 vs 도버교육청 재판에서 이슈가 되었던 지적설계론 ‪‎위장창조과학‬ 불쏘시개‬ 교과서였던 ≪of Pandas and People≫ 공저자 중 하나이며, 안티진화론 지지자들이 엄청 많이 내세우는 ≪Icons of Evolution(진화론의 우상들)≫ 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나단 웰스는 생전의 문선명의 지시로 진화론을 반증하기 위해 분자생물학+세포생물학을 박사까지 전공했다고 한다.

조나단 웰스는 단순히 통일교 신자인 분자생물학 PhD일 뿐 아니라, 정식으로 뉴욕의 통일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통일교 신학자이며, 통일신학교에서 통일교 신학 관련 강의를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 http://www.darwinismandid.com/then/index.php)

그리고 1997년까지 Unification Theological Seminary(통일신학교)에서 Board of Trustees(이사회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니만큼, 일단 조나단 웰스의 ID(지적설계) 및 안티진화론 활동과 통일교의 관계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참고: http://goo.gl/ZXVNJP)

참고로, 진화유신론 단체인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조나단 웰스의 글직접 인용하여 그의 안티진화론 활동은 '문선명의 가르침'에 의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Consequently, at least a few important ID authors are not Christians. Here the best known example is undoubtedly Jonathan Wells (read more here and here), a follower of the late Rev. Sun Myung Moon. The recipient of earned doctorates in both Molecular and Cell Biology (Berkeley) and Religious Studies (Yale), he also has a degree from the Unification Theological Seminary (Barrytown, NY). This is not an incidental fact, since Wells himself has said that “Father’s [Moon] words, my studies, and my prayers convinced me that I should devote my life to destroying Darwinism, just as many of my fellow Unificationists had already devoted their lives to destroying Marxism.” Nevertheless, his best-known book, Icons of Evolution (2000), is often sold at creationist meetings in churches and at Christian bookstores."

- Biologos Blog: http://goo.gl/N3vF7v

무엇보다, 현재 창조과학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안티진화론의 거의 모든 논리는 1970년대 말쯤에 통일교에서 확립(?)이 된 것이다. 즉 1960년대에 미국 남침례교에서 1920년대의 안식일교의 홍수지질학을 흡수해서 나온 '과학적 창조론' 운동을 통일교에서 이어받아 안티진화론의 논리를 덧붙여 나간 것이다. 이를 위해 통일교는 문선명 총재의 교시를 받들어 1970년대 초반에 "국제과학통일회의(ICUS)"라는 창조과학 관련 학술 행사를 개최하여 안티진화론적 논리의 기틀을 닦았고, 이는 2017년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창조과학 컨퍼런스에는 어딘가의 듣보잡이 아니라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John Eccles를 위시한 전 세계의 네임드급 과학자들 중 창조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거 끌어모으게 된다.


첨언하자면, 비단 "통일교 신자"만을 볼 것이 아니라, 통일교 자체에서 내부적으로 어떤 지향점을 갖고서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일단 알려져 있는 사실로만 따지자면 통일교는 종교 교파를 가리지 않고 창조과학의 안티진화론 논리 확립을 위해 전방위적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너던 웰스의 안티진화론 작업은 통일교가 그런 식으로 물심양면으로 전폭 지원했던 결과물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읽으면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 포스팅은 통일교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통일교가 어떤 종교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통일교를 이단으로 여기는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창조과학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반진화론적 논리의 거의 대부분이 알고 보면 통일교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참고문헌과 링크

Young, C. C. & Largent, M. A. Evolution and Creationism: A Documentary and Reference Guide. (ABC-CLIO, 2007). [ISBN 978-0-313-33953-0] https://goo.gl/E0tdXx

Forrest, B. & Gross, P. R. Creationism’s Trojan Horse: The Wedge of Intelligent Desig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ISBN 978-0-19-803578-7] https://goo.gl/c6RsBS


통일교와 과학. 위키백과 (영문)


국제과학통일회의. 위키백과 (영문)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Unity of the Sciences (ICUS)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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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 dimorphism(성적이형성)"은 같은 종의 암컷과 수컷 사이에 겉모양의 차이가 보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암수간에 색깔, 모양, 크기, 구조 등의 차이가 있으며 모두 후천적-환경적이 아니라 선천적-유전적 요인에 의해 그 차이가 결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조류는 많은 종에서 암컷은 보호색을 띠어 숨어서 새끼를 돌보는데 유리하고, 반면 수컷은 화려한 색을 띠어 구애행위 및 영역표시행동에 특화되어 있다. 그리고 산비늘도마뱀(mountain spiny lizard; Sceloporus jarrovi)의 경우는 암수의 크기는 거의 유사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크기의 먹이를 먹는다고 한다.

포유류의 경우 성적이형성이 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개코원숭이의 경우는 수컷이 암컷의 두 배 가량 되며, 큰바다사자는 수컷 성체의 체중이 대략 1톤이며 이는 암컷 성체의 대략 세 배 가량 된다. 암컷의 몸집이 더 큰 성적이형성은 포유류 이외의 동물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곤 한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exual dimorphism]


동성간 vs 이성간 공격성의 성별차이에 대해 2015년에 옥스포드 실험심리학과에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공격성의 성별차이에는 크게 두 가지 이론, 즉 진화적 성선택이론과 사회적 역할이론이 다소 상충하지만 가장 많이 설명되고 있는 이론이다. 이 논문에서는 영국의 평균 15세의 남녀 학생 11,307명을 대상으로 동성 및 이성에 대한 공격성향을 조사하였는데, 성선택이론에 따르자면 남성 위주의 동성간 공격성, 사회적 역할이론에 따르자면 남성 위주의 이성간 공격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는 어느 한쪽 이론만을 채택하면 이에 상충하는 반대쪽 결과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므로 두 가지 이론을 함께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일반론을 말하자면, (1) 남학생은 여학생보다 동성에 대한 공격성이 두 배 가량 강하며, (2) 남학생은 여학생보다 이성에 대한 공격성이 두 배 이상 강하다. 그러나 학급별로 따지면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공격성이 강한 학급 또한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남학생 위주의 동성에 대한 공격성이 강한 학급의 경우는 남학생간 계급성이 강하며, 남학생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학급의 경우 두드러지며, 여학생이 많은 학급의 경우에는 남학생 위주의 이성에 대한 공격성이 강하게 보인다.

전통적인 남녀간 "사회적" 젠더 역할의 차이를 강조하는 소수인종 그룹과 전형적인 현대유럽(영국)의 서양인종 그룹은 전자가 "사회적 역할 이론"에 따라 이성간 공격성을 다소 강화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남학생의 경우에는 동성간 공격성 역시 강화하고 있다.

즉, 인간의 공격성은 진화생물학적 전제조건에 사회문화적 영향이 덧씌워져 이루어지는 것이며, 진화적 성선택은 동성간의 공격성, 그리고 사회적 젠더역할의 영향은 이성간의 공격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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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ight of evolution IV: The human condition (진화에 비추어 IV: 인간의 조건)


창조과학 및 지적설계론(ID)이 왜 헛소리인지에 대한 진화유전학자 John C. Avise의 심도있는 고찰 및 왜 창조과학 및 지적설계론이 헛소리인가에 대한 각론에서의  의견차이로 인한 논쟁들. 참고로 이 이야기는 2010년에 Arthur M. Sackler Colloquium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에서 논의된 이야기다. 여기서 Avise는 본인의 책 <Inside the Human Genome: A case for Nonintelligent Design> (서평) 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해당 콜로퀴움의 동영상은 아니지만 같은 해의 Darwin Day에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John C. Avise가 동일 주제로 발표한 동영상이 있어 아래 첨부한다.




Avise JC (2010) Colloquium paper: Footprints of nonsentient design  inside the human genome. Proc Natl Acad Sci USA 107(Suppl 2):8969–8976.


요약하자면, 종교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은 생명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각종 질병과 고통을 양산한 무자비한 존재, 그리고  대규모의 살생을 저지른 잔인한 학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어쩌면 신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생명이 깃들었으나 랜덤한 자유의지로 인해 그 은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긴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Evolution by natural causes in effect emancipates religion from the  shackles of theodicy. No longer need we agonize about why a Creator God is the world’s leading abortionist and mass murderer. No longer need we query a Creator God’s motives for debilitating countless innocents with horrific genetic conditions. No longer must we anguish about the interventionist motives of a supreme intelligence that permits gross evil and suffering in the world. No longer need we be tempted to blaspheme an omnipotent Deity by charging Him directly responsible for human frailties and physical shortcomings (including those that we now understand to be commonplace at molecular and biochemical levels). No longer need we blame a Creator God’s direct hand for any of these  disturbing empirical facts. Instead, we can put the blame squarely on the agency of insentient natural evolutionary causation. From this perspective, the evolutionary sciences can become a welcome partner (rather than the conventionally perceived adversary) of mainstream religion.


The evolutionary-genetic sciences thus can help religions to escape from  the profound conundrums of ID, and thereby return religion to its rightful realm—not as the secular interpreter of the biological minutiae of our physical existence but, rather, as a respectable philosophical counselor on grander matters, including ethics and morality, the soul, spiritualness, sacredness, and other such matters that have always been of ultimate concern to humanity."


관련 반응들:


Chapman RW (2010) The genome is the perfect imperfect machine. Proc Natl Acad Sci USA 107:E119

생물계는, 생화학, 유전자 조절, 생리, 생태 등의 단위에서 구성요소간에 상호작용하는 복잡계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이는 무작위적 공격에는 저항성을 갖지만 방향성을 갖는 공격에 의해서는 쉽게 변화하는 Small World Network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네트워크는, 선택적 압력이 존재하는 한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구성해 나가기 때문에, '지적 설계자'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Avise JC (2010 Reply to Chapman: Perfect imperfection? Proc. Natl. Acad. Sci. USA 107:E122

채프만이 말하기를, "만약 내가 창조주라면 게놈을 Small World Network의 구조로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 이 말은 도브잔스키의 유명한 발언을 연상케 한다. "나는 창조론자이자 동시에 진화론자다. 진화는 신이, 또는 자연이 창조하는 방법이다."

Chapman states(1), “[i]f I were the creator, I would organize the genome as an SWN.” In some ways, this sentiment harkens back to a famous statement by Dobzhansky(4): “I am a creationist and an evolutionist. Evolution is God’s, or Nature’s method of creation.”


Murray MJ, Schloss JP (2010) Evolution, design, and genomic  suboptimality: Does science “save theology”? Proc Natl Acad Sci USA  107:E121

"ID 이야기는 철학이나 신학 이야기라 과학 저널에 맞지 않는 주제 같다."

"...rather than being made in a journal of scientific research, such a  claim ought to be vetted in a venue appropriate to rigorous assessment  in light of relevant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literature."


Avise JC (2010) Reply to Murray and Schloss: Designer genes? Proc Natl Acad Sci USA 107:E122

'대마가 이미 죽었는데 굳이 더 때릴 필요가 있느냐'는 머레이와 슐로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게놈의 불완전성'이 지적설계론에 대한 강한 반론이 되기 힘들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전지전능하며 선한 신'이 진화적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그렇게 설계하여 인간의 게놈을 현재와 같이 만들었다면, 그 신은 실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신 또는 사악한 신이 될 수밖에 없다. 게놈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유전병이 발생하고 한 해에도 수백만의 태아가 유전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자궁 내에서 죽어버린다. 지적설계론자들이 그런 (사악한) 신을 숭배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긴 하지만, 반드시 염두해야 할 점은, 그러한 신정론적 딜레마는 게놈 구조와 기능 속에 오랫동안 깊이 자리하고 있어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형태로든 "신"이라는 존재가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 (지금 이 경우에는 진화의 법칙)을 사용하여 이 세계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신학을 철학적으로 '구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과학은 인체 게놈이 분자적으로 오류투성이며 인류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이제는 신학자들이 그러한 '불편한 진실'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때가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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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관련 글들을 찾아보러 가톨릭 경향잡지에서 검색질하다가 발견한 특정 가톨릭 신자 정치인의 글을 옮겨적어 보았다. 천주교 교회사, 민중신학, 해방신학, 과정신학 등에 대한 예상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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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1986년 9월호 - 이 시대의 순교


[모든 것 바쳐 주님의 여사에 동참해야]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와 비견해서 참 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하고 싶다.


종교 철학가들은 말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고등 종교는 그 출발 당시 저변의 민중 속에 뿌리박고 민중에 의해서 힘을 얻은 종교만이 오늘의 대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인류 역사상 수천 수만 개의 종교가 발생했다. 그중에서 오직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만이 전인류적 보편성을 띤 고등 종교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민중 속에 뿌리박았다는 것은 종교가 그 시발에 있어 민중의 편에 서고 민중의 아픔과 한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들의 영적 사회적 구원에 헌신함으로써 민중의 감동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고등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악과 민중 구원의 차원에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은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했다. 순교자가 뿌린 피는 그 종교를 더욱 영적으로 승화시키고 현세적으로 강건하게 만들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순교에 감동되어 순교자의 뒤를 따랐으며 신앙의 진리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마침내 지배자들은 순교자의 피와 그를 따르는 민중의 힘에 압도되어 그 종교의 포교를 합법화하고 지배층 자신까지도 그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 중에도 그리스도교의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고 철저한 것이었음은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창시자인 예수님 자신이 이미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창시자의 순교란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는 예가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 일생을 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당시의 지배계층인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들의 위선과 착취로부터 영적으로 현세적으로 해방시키고자 싸우셨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유다 의회인 산헤드린을 둘러싼 이들 지배층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이름 아래 안식일 정결례 그리고 성전에의 예물 봉헌 규정을 악용하여 민중을 괴롭히고 차별하고 착취했다. 이러한 하느님 모독의 죄악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억압받는 민중과 일체시키고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자로서 단호히 투쟁하셨다. 그러다 마침내 내란을 선동한 정치범으로 몰려서 순교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은 로마에서의 초기 교회의 역사에 역력히 재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와서 3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박해와 피의 순교를 되풀이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노예, 소상인, 병사 등 당시 로마 사회의 저변 민중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황제에 대한 우상 숭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까따꼼바의 지하 묘지를 전전하면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애썼다. 불행히 잡혀가더라도 지배자들이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혹은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혹은 콜로세움의 투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순교에의 정열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예가 없는 이러한 순교 정신에 공포와 경외심을 느낀 로마의 지배자들은 기원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를 합법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철저한 노예 제도, 농민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병사와 소상인에 대한 계급적 차별이 성행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하느님 안에 그들은 모두 한 형제요 평등함을 그리스도교는 선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로마 제국에 있어서 로마 본국인이나 식민지인이나 모두가 하느님 앞에 같은 자유인임을 그리스도교는 주장한 것이다. 3세기에 걸친 탄압을 대하같이 흐르는 순교의 피로써 극복하고 마침내 대 로마 제국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당시 로마 인구의 10퍼센트 내외밖에 안되었었다. 종교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수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참된 순교의 정신과 그 실행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제 2백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이 땅은 수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순교의 제단에 바쳤다. 제단은 순교자의 피로 씻기고 또 씻기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밖에서 찾아온 신부의 포교에 의하지 않고 이쪽에서 찾아가서 그리스도교를 영입해 온 특별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순교 성인을 낸 영광의 나라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인구는 전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종교나 교파도 한국 가톨릭이 바친 바와 같은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을 치른 일이 없다. 그 순교의 힘으로 이 나라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마침내 실현되었다. 조선 왕조 말엽까지 불교도 동학도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우리 국민의 기본 인권인 신앙의 자유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선구자적 공헌을 다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103위의 많은 성인을 낸 성인 국가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교회의 역사는, 한국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는 교회의 영향력이 그 교인수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힘과 존경을 향유하고 있다. 눌린 자가 있는 곳에,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외침이 있다. 그 외침 속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순교 정신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순교는 반드시 육신의 죽음에 의한 희생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고 그를 증거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순교의 원형은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다가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다. 순교는 자기가 갖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이웃에게, 그것도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내놓는 것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노력만이 아니라, 필요하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놓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은 공산 국가에서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이 팽배하고 있으며, 세계 도처에서 정치적 지배자에 의한 또는 경제적 사회적 제도에 의한 민중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와 소외가 성행하고 있다. 이때에 억압과 착취와 전쟁을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의 증거자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야말로 참된 순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순교란 원래 그리스 말에 있어서 증거자를 의미했다고 한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우리 주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는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의 대열에의 참여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큰 의문이 있다. 그것은 왜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순교적 희생이 필요한 사회를 만드신 것일까? 하느님이 참으로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왜 이 세상에 그토록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이 필요로 한 악이 횡행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고 선이 패배하는 수없는 사례들을 우리가 눈앞에서 목격할 때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 번 감옥을 출입하고 일생에 다섯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 직면하는 가운데 이러한 의문과 대결하는 번민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풀고자 무던히 노력도 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 우리를 연단(鍊鍛)하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뜻에서 악을 허락하셨다는 '욥기'적인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단련하고 시험하시려면 선(善)만을 세워놓고 가장 높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경쟁을 시키면 됐지 굳이 악의 창조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어머니의 태속으로부터 천치 바보로 태어난 사람이라든가 원자탄이 떨어져서 일순간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슨 하느님의 연단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엄청난 신앙상의 시련이요 난문이었다.


결국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진화론적 하느님의 역사 설명에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하느님은 이 세상을 처음부터 완전한 것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완성을 인간의 협력을 어어서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협력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의 한복판에 서서 우리를 위로,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며 앞으로 예수 재림의 종말의 날 즉 '오메가 포인트'의 그날에의 도래를 촉진시키는 역사에로의 동참을 위해서 초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러한 역사의 협력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기위해서 이 세상의 악과 모순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싸우다 보면 그 사람은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순교적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은 전진하게 된다. 순교적 희생을 바친 자들은 예수님의 품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 순교적 생활은 이 세상 발전의 밑거름이며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의 길이다. 그리고 자기를 가장 값있고 충족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장래는 신자 수의 다과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따르는 순교적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자와 '교회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악과 절망의 와중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목메어 외치시는 이 시대의 순교에의 초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긴 옥중 생활에서 나의 기도와 묵상은 순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음미하고 재정리하게 만들었다.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마치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증거자로서의 순교적 생활을 미력이나마 나의 정성을 다해서 그분께 바치고자 결심하고 있다.


(누구 글인지 궁금하면 더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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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링크한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과학 교사들이 수업 교보재로 사용할 만한 자료를 추천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 링크에 있다. 미국의 Howard Hughes Medical Institute 에서 만든 'BioInteractive' 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과학교육용 자료인데, 중고등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진화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중에 예를 들어 준 동영상은 '적자생존: 자연 선택과 적응' 이라는 제목의 페이지다.



다음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기 바란다. 대략 10분 30초 가량 되는 짧은 동영상이며, 영어듣기 잘 안되는 분들은 자막을 켜고 들으면 된다. (영상화면의 오른쪽 아래 부분에 자막 표시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



이 동영상에서는 털색깔이 어두운 바위주머니쥐(rock pocket mouse; 유대류 주머니쥐와는 다른 종류)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통상적인 야생 바위주머니쥐는 비교적 밝은 털색깔을 갖고 있다.) 하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자연 선택에 의한 바위주머니쥐 털색깔의 진화를 설명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바위가 어두운 색깔인 지역에서 10만 마리 중 한 마리라도 포식자에 의해 발견되기 어려운 어두운 털색깔의 변이가 발생하면, 이것이 조금만 생존에 유리해도 매우 빠른 기간 내에 결국은 전체 군집 내에서 그 변이를 가진 개체들이 다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1%의 털색깔이 어두운 쥐가 생겨서 이로 인해 1%만 생존에 유리해도, 1000년 지나면 어두운 털색깔의 쥐가 전체 군집의 95% 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다. 10% 유리하면 100년이면 된다. 


즉, 우연히 생긴 변이가 서식지의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할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변이된 형질의 발현 빈도가 결국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와중에 포식자는 위쪽에서 보고 공격하기 때문에 배는 어두운 색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배의 털색깔이 흰색인 쥐들도 등이 어두운 색이면 많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양념으로 첨가한다. 자연 선택에 의해 생존에 불리한 "모든" 형질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재현이 가능하다!


전혀 다른 지역의 바위주머니쥐 군집을 조사한 결과, 땅색깔이 어두운 지역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털색깔이 어두운 쥐들을 조사한 결과, 전혀 다른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같은 결과(비슷한 정도의 어두운 털색깔)가 나타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화는 결코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무작위적인 과정이 아니다. 단지 "돌연변이"라는 한 가지의 무작위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자연 선택"에 의해 그 돌연변이를 일으켜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승자와 그렇지 못한 패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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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에 미국의 교육방송인 PBS에서 진화에 대한 오개념들에 대해 정리한 기사. (1부) (2부)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악영향 중에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안티과학의 전파이며, 반면 당장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교육계를 서서히 좀먹고 있는 것은 진화에 대한 오개념의 전파이다. 그중 대표적인 오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진화"는 "적자생존"과 동의어다. (X)

  • 진화는 단지 '적응' 또는 '적자생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 내에서 유전되는 변이의 축적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2. 모든 형질은 적응에 의해 나타난다. (X)

  •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모든 네발동물의 발가락은 다섯 개지만, 딱히 그것이 네 개나 여섯 개라고 해서 생존에 더 유리하거나 불리하지는 않다. 또한 흔적기관의 경우에도 생존에 유불리가 없음에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3. 진화는 우연에 의해 나타난다. / 진화는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X)

  • 진화는 우연과 필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진화의 요인 중 돌연변이나 유전자 부동은 대표적인 우연적 요소이며 자연선택은 대표적인 필연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진화에 대해 설명할 때 목적론적 논증을 최대한 배제해야 학생들로 하여금 진화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잡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쥐들은 바뀐 바위색에 적응하기 위해 털의 색을 바꿨다"라기보다는 "쥐들의 바뀐 털 색깔로 인해 바뀐 바위색에 적응하기 유리해졌다"고 하는 것이 옳다.


4. 진화적으로 나중에 나타난 생물들이 그 이전에 나타난 생물들보다 더 우수하거나 발전되었다. (X)



출처: 'Understanding Evolution' (2016). University of California Museum of Paleontology.


  • 현재 살아있는 생물들은 현재의 환경에 '충분히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생물종들이 멸종된 생물종들보다 딱히 더 우수하다고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런 생각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scala naturae' 즉 '자연의 계단'이라는 개념에 의한 것인데, 말하자면 인간을 모든 생물종보다 우월한 최상위에 놓고 식물을 가장 하등한 하위에 놓으며 다른 동물들은 그 사이에 위치한다는, 소위 인간중심적이며 동물우선적 개념이다.
  • 이 오개념에 대한 정정이 중요한 것이,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 또는 '물고기가 양서류로 진화했다'는 오개념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원숭이와 사람은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분기되어 나왔으며, 물고기와 양서류 또한 마찬가지다. 현생종들은 그러한 '공통 조상'으로부터 종분화가 이루어져 동일한 시간 동안 동등하게 진화해왔을 뿐이다.


참고할 만한 링크 (한글)


참고할 만한 링크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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